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
노인은 사자꿈을 꾸고 있었다


깎고, 파고, 매달리며 꿈꾸는 영상

이번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1>의 영상 배경과 오브제들은 대부분 발견된 것들이다. 작업 내내 계획되지 않은 상황에서 발견된 인물, 공간, 대상을 프레임 안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했다. 이전 무진형제의 작업 방식대로라면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그 시나리오에 맞춰 배경세트, 오브제, 의상 등을 미리 제작해 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 영상에서는 준비할 게 없었다. 대신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채 노인의 신체와 그의 물건들이 놓인 상황 자체에 집중해 그것들을 어떤 각도와 색감으로 담아낼지 고민했다.

확실히 내용에 따라 새로운 질료를 만지고 가상의 오브제를 만드는 것과 한 인물을 통해 숨겨진 공간과 오브제를 발견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의 작업이다. ‘이것들이 왜 이렇게 배치되어 있을까? 왜 이런 형태로 쌓여있을까? 언제 이 물건을 마지막으로 만졌을까?’ 하는 의문들 속에서 인물과의 연관성을 생각하고 공간과 오브제들을 관찰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가령 영상 후반에 노인이 침대에 매달리듯 잠을 자고 있는 장면이 있다. 노인은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잠이 들었는데, 한 결 같이 가족사진들이 잔뜩 걸려있는 방 안 침대에서만 잔다. 그가 잠든 후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노인의 몸뚱어리와 벽을 가득 채운 사진 속 다복한 가족의 이미지들 사이의 묘한 대비가 두드러져 보였다. 무진형제는 그런 분위기를 잡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잠든 노인 곁에서 다양한 각도와 색감을 연구하며 촬영에 임했다.

개인적으로 오브제에 관한 가장 큰 의문은 벽면의 녹슨 못에 걸려 있는 밥상들이다. 그걸 본 순간 ‘왜 밥상들을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걸어놓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오래전 사람들로 북적일 때 그 밥상들은 부엌과 방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채 그 넓은 표면에는 그릇과 수저, 음식들로 가득했다. 수직적으로 세워져 놓일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 밥상은 표면 위에 밥을 차릴 사람도 먹을 사람도 없이 쓰임을 상실해 제각기 삐뚤빼뚤한 모양으로 무심하게 벽에 걸려 있다. 이상하게도 그 어정쩡하게 세워진 상 표면과 마주하면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는 노인의 집이 더 크고 공허하게 보인다. 사람의 든 자리와 난 자리를 동시에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이렇게 노인의 집에 놓인 생활용품들은(우리에게는 오브제) 오랜 사용으로 자연스러운 질감이 형성되었고, 놓인 위치 또한 어느 입체 작업보다 훌륭했다. 물건이 사람의 손을 타고 에너지가 흐르면 그 물건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달라진다. 밥상을 비롯한 많은 물건들이 노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방치되는 동안 제각기 다른 기운을 담고 있는 듯했다. 쓰이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은 채 노인과 그의 생활용품들, 그리고 가족사진이 그 집안에서 한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듯했다. 무진형제는 그 공간과 물건들 앞에서 시간의 흔적과 물성을 발견해 이를 영상 안에서 배치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물론 답이 없는 작업이었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영상 프레임 안에서 카메라와 렌즈가 지닌 조건을 따져가며 그것들 속에서의 조형성을 고민해볼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만들어진 작업이 영상 안에서 어떻게 놓이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면, 이번 작업은 영상의 각 장면을 하나의 조형물처럼 만들고 싶었다. 주어진 재료라고는 노인의 신체 혹은 세간, 그리고 자연의 빛과 예기치 못한 사운드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무진형제는 그러한 재료들을 가지고 이 영상에서만 가능한 조형성을 구현하기 위해 기다리고 시도하고 따라다니길 반복하며 작업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는 첫 번째 영상과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작업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번째 영상이야말로 첫 번째 영상에서 견지해 왔던 조형성에 대한 고민, 특히 질료의 특성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은 작업이다.

우선 두 번째 영상에서는 구를 파는 인물과 빙판 위를 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둘 다 단단하게 굳고 얼린 것들을 날카로운 것들로 긁고 파 내려가며 제각기 길을 내는 행위를 한다. 인물들마다 두 손과 발을 이용해 구와 빙판, 그리고 가상의 도시 위에 길을 내는데, 그럴수록 사물과 지층은 더 작아지고 끝내는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마치 내레이션 속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본인들이 꿈꾸던 집을 짓고 그곳에서 자손을 번창시키기 위한 삶의 길을 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집은 낡아 기울고 자손들은 성장해 각자 고향을 등지고 살아 끝내 혼자 남게 된 것처럼 말이다.

내레이션에 맞춰 무언가를 만들고 흩어진 것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내려 했기 때문에 촬영 전에 여러 가지 것들을 미리 제작했다. 구, 좌대, 안개, 3D 이미지 등. 물론 영상에서 이것들은 부서지고 흩어지고 사라져버린다. 특히 구는 한번 깎기 시작하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구를 파는 행위가 어찌 보면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 같지만 그 행위마다 각기 다른 길들을 만들어낸다. 특히 구를 파면 팔수록 점점 더 작아지기 때문에 영상 말미엔 힘 조절을 하며 조금 더 세심하게 깎아냈는데, 결말에 가까울수록 아주 작은 조각이 되어 주변엔 하얀 가루들만 남았다.

구를 깎는 작업은 여름 숲에서 밤새도록 이뤄졌다. 주위가 밝아질 때쯤 커다란 구는 작은 알갱이가 되었고, 주변에는 흰 가루들이 쌓여있었다. 그 흰 가루들의 패턴이 재미있었는데, 떨어지는 양과 방향 등에 의해 제각각 묘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전시장에 설치된 17장의 사진은 그런 과정 속에서 포착한 것들이다. 구는 인간 존재의 삶이 지니고 있는 역설을 드러낸다. 날카로운 조각칼에 의해 길이 나자마자 사라지는 구처럼 인간의 삶 자체가 죽음을 향해 있다는 역설이다. 한 사람의 기억이 무수한 기억과 언어로 남겨지듯 거대한 구에 길을 내면 흰 가루들로 남아 바람과 불빛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낸다. 보고 있다 보면 마치 어떤 이들의 삶의 흔적 같다. 무진형제는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포착했고, 전시 공간에서는 총 17장의 사진을 낡은 나무 집처럼 생긴 전시 공간의 천정에 설치했다. 사진 설치물은 첫 번째 영상과 두 번째 영상 사이에 또 다른 이미지의 길을 만들어낸다. 그 사진 이미지의 뒤쪽에 설치물이 하나 더 있다.

두 번째 설치물은 바닥 위에 세워진 구조물에 매입된 유리은판 필름으로, 첫 번째 설치작업과 대비되는 위치에 있다. 영상 사운드와 관람객이 내는 소리에 따라 조명이 켜졌다 꺼지길 반복하는데, 한 손에 쥐어질 만큼 작고 얇은 유리 은판이 내부의 불빛에 의해 반짝일 때마다 1899년에 촬영된 흑백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작가를 알 수 없는 작은 은판은 가운데에 금이 가 두 조각으로 나뉘는데, 그 작은 사이즈와 달리 내부의 이미지는 멀리서 포착한 거대한 동산이 중심을 이루고, 그 꼭대기에 꼿꼿이 서 있는 사람이 있다. 유리은판은 바로 사람의 등 뒤에 길게 금이 가 있다.

사실 이 필름은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전체 작업의 시작과 끝을 포괄한다. 처음 이 유리은판을 발견하고 무진형제는 멀찌감치 서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가 서 있는 땅에 금이 가 있는 사실이 꽤나 흥미로웠다. 무진형제는 그 미지의 이미지로부터 노인의 잠꼬대와 단절된 세대 간의 거주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확한 언어로 기록하려 해도 노인이 방언으로 꾸고 있는 잠꼬대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 3대의 거주 이야기는 한데 묶일 수 없어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말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투명한 유리에 검고 단단하게 박힌 동산에 꼿꼿하게 서 있는 사람, 하지만 그마저 반으로 쪼개진 상태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이야기다.

무진형제는 그 기록의 실패, 서술의 불가능성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유리은판 뒤에 LED조명과 센서를 달아(이 센서는 전시장의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와 형식으로 설치될 수 있도록 제작했다.) 관객들이 내는 소리와 영상 사운드에 의해 120년 전의 이미지가 현재의 공간 속에서 반짝거릴 수 있게 했다.

유리은판의 균열은 영상작업 전체의 이야기 구조와도 맞아 떨어진다. 특히 두 번째 영상에서 금이 가고 서서히 부서지고 내려앉기 시작한 노인의 집, 그의 아들이 소유한 오래된 아파트, 그마저도 없이 떠돌며 자신의 거주 이야기조차 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내레이션 사이의 간극이 그러하다. 핏줄로 연결된 3대의 거주 이야기를 한 호흡의 글과 영상으로 표현할 때마다 깨어진 유리은판처럼 어딘가 금이 가고 부서지고 이상한 방향으로 길이 나버렸다. 또한 작업 전체를 봤을 때도 유리 은판 이미지에 난 균열은 첫 번째 영상에서 노인의 오래된 집에 난 균열, 그리고 두 번째 영상에서 길을 내면 낼수록 사라지는 구를 파는 장면, 마지막으로 스케이트 씬과 연결된다.

그 모든 균열과 깨어짐 속에서 생성된 가루들이 바로 17장의 사진 이미지이다. 두 개의 설치 작업은 이처럼 두 편의 영상 사이에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고 또 다른 시작을 예고했다. 영상의 사운드 속에서 관객이 사진 이미지 꼭대기에 켜진 조명을 따라 다음으로 이동할 때면 그 걷고 뛰고 구르는 소리에 맞춰 유리은판의 조명이 불규칙적으로 반짝인다. 그렇게 무진형제는 작업의 흔적과 한 세기 전 이미지의 흔적을 관객들에게 제시해 그들로부터 또 어떤 삶과 거주의 이야기가 가능한지 되묻고 싶었다. 어쩌면 두 번째 영상에서 가상의 이미지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처럼 한없이 매끄럽고 흔적 없는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 삶의 형태를 어떤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는지, (비록 그 기록의 시도가 종국엔 불가능해질지라도) 되묻고 싶었다.

정효영
무진형제



초근접으로 포착한 97세 노인의 하루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1>은 화면과 소리의 밀도가 중요하다. 4K 화질의 촬영과 편집, 좀 더 예민하고 확실한 방향성을 갖는 스테레오 소리 등에 집중해서 작업했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그저 고즈넉하게 흐르는 노인의 시간으로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노인의 신체를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다 보면 그의 신체 주름의 접힘과 펼쳐짐, 행위 사이의 순간적인 멈춤 등에 의해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다. 그 신체의 이미지와 움직임 자체가 상기시키는 시간성이 있다.

촬영이라는 행위가 그런 것 같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다가간 순간에도 피사체와 전혀 다른 관계가 형성될 때가 있다. 물론 그 관계란 것이 갑자기 생기거나 무작정 기다린다 해서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무진형제는 촬영 시작 전부터 노인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춰 촬영할지 고민했다. 사실 노인은 평소 움직임이 크지 않고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집밖을 거의 나서지 않은 채 하루 종일 앉고 서고 잠자는 게 그의 일과의 전부였다. 때문에 좀체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노인의 하루를 어떻게 담을지도 고민이었다.

이 모든 고민을 일단 카메라와 렌즈에 맡겨보기로 했다. 우선 망원의 화각과 접사의 기능이 모두 가능한 렌즈를 이용해 노인의 신체를 따라다니며 상황에 맞게 클로즈업(close-up)과 롱테이크(long-take)로 계속해서 변환하며 담아보았다. 그렇게 일상에서 노인만이 보여주는 반복된 몸짓과 행위에 주목했다. 보통 인물의 행동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인물과 그 인물이 속한 장소나 배경을 함께 담아낸다. 그러한 장소나 배경을 통해 인물의 캐릭터와 몸짓, 세계와의 관계성, 그리고 그가 휘말리게 될 사건 등을 암시하게 하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이번 영상 촬영 때 우리는 배경을 일부러 흐릿하게 하거나 제외한 채(아웃포커싱 등의 기법을 통해) 오직 노인의 주름진 신체만을 중심에 두었다. 노인이란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수반되는 미세한 동작들, 나지막한 호흡에 의해 발생하는 신체의 가느다란 진동이 눈에 들어왔다. 때문에 아주 가까이에서 지긋이 응시하고 있는 자의 시점에서 노인을 바라보며 촬영했다. 그 과정에서 노인의 방과 바깥 풍경 등의 배경은 대부분 흐릿하고 불분명하게 제시된다. 그렇게 한 공간에서 클로즈업된 노인의 신체로부터 흐릿하게 제시된 배경은 노인이 그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동작을 취한 순간 점차 뚜렷해진다. 그리고 노인이 어떠한 세계에 속해 있는지 좀 더 분명히 제시된다. 노인의 신체로부터 시작된 영상은 노인의 행위와 장소의 변화에 따라 점차 멀어지고 또 다시 노인의 신체로 되돌아오게 된다.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노인의 신체는 화면에서 ‘구체적인 것들(특히 노인의 신체)’로 꽉 차있는 현실의 ‘압박감’ 같은 것으로 감지된다. 노인이 머무르는 곳에서의 세계 혹은 현실이란 곧 그의 신체이다. 그것만이 움직이는 시공의 흔적이며, 늙어가는 현실의 단면을 가감 없이 깨닫게 만든다. 아마도 비교적 젊은 우리가 노인을, 그리고 늙어가는 자신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무진형제에게도 그 노인의 신체만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촬영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노인의 굴곡진 주름의 패턴과 어딘가 휘어진 노인의 손가락 등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의 지나간 시간이 농축적으로 드러난다. 부지런한 농부로서 6남매를 키워낸 가장이었던 과거 시간들이 그의 신체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때론 노인의 신체가 동시대 현실과 단절돼 보일 때도 있었다. 특히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있을 때마다 화면 속 노인의 모습은 그가 살아온 긴 시간과 앞으로 주어진 짧은 시간 사이에 놓인 기괴한 형상처럼 보인다.

무진형제는 이러한 노인의 모습에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투영하게 되는 노년의 비극이나 쓸쓸함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다. 노인이 어딘가를 바라볼 때, 차를 타거나 전화를 할 때, 우편물을 만지거나 밥을 씹을 때, 잠을 잘 때 등. 그의 골격과 피부가 그의 행동의 구조를 드러내면 우린 그걸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담아냈을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러한 행동의 구조는 특정한 리듬을 가지면서 영상 속에서 또 다른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평소 노인들의 행동이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았기 때문이다. 촬영자의 입장에서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노인의 신체는 어떤 경우에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멈춤이 없다.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신체에 진동이 일며 늘 돌발적인 상황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촬영을 하면서 노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인해 화면의 초점이 나가거나 화면 밖으로 대상이 벗어나는 경우가 잦았다.

이 영상은 낮 시간에 활동하는 노인의 몸짓과 밤 시간에 발화하는 소리가 혼합되어 구성된다. 우리는 노인이 잠들 때마다 내는 잠꼬대 소리, 앓는 소리, 숨 쉬는 소리 등을 녹음해 그가 활동하는 장면에 입혔다. 영상 전체에서는 전화통화 소리와 “하나마나 하더라.”, “잊어버리고 안 와부러.”의 두 대사를(현장 녹음) 제외한 모든 노인의 소리는 그가 잠든 후에 내는 숨소리와 잠꼬대가 뒤섞여 있다. 그 결과 우리가 보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꿈의 장면들인지, 혹은 완전히 깨어 활동하고 있는지 모호해졌다. 사람의 기억이 그렇듯이 우리는 노인의 신체 이미지 조각에 그가 내뱉은 잠꼬대 조각, 그리고 그를 둘러싼 자연 환경과 꿈의 한 장면의 재현 등의 장면 조각들을 노인의 하루라는 시간에 따라 유기적으로 조직해 보았다. 우리가 노인을 카메라에 담은 방식은 이러하다.

노인의 신체가 다른 행위를 하거나 장소를 이동하기 시작하면 카메라의 워킹도 점차 멀어진다. 특히 노인이 잠든 장면은 그의 신체가 아닌 방 전체를 광각촬영으로 담아냈다. 이제 그의 신체는 비단 주름지고 변색된 피부와 관절의 움직임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신체는 잠이 들자마자 나지막한 잠꼬대를 시작한다. 그렇게 그의 방과 그 안의 물건들마다 그의 호흡과 잠꼬대로 가득 차게 된다. 잠에 빠져든 채 알아듣기 힘든 방언의 잠꼬대를 내뱉는 그의 주변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노인의 집을 가득 채운 물건들 중 노인의 몸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족사진들이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여러 개의 액자에 속 대가족의 사진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천장 아래에서 불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 노인 모습이 대비되어 보인다. 그러한 대비 속에서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견디게 한 노인의 삶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다.

정영돈
무진형제



늙은 잠꼬대와 어린 사변

노인은 약 한 세기를 고향 마을에서만 살아왔다. 젊은 시절 자신이 선택한 땅위에 손수 집을 지어 부모를 모시고, 형제들을 장가보내며, 자식들도 키워냈다. 그러다 선산에 부모와 형제들을 묻어주고, 동네 어귀에서 제 밥그릇을 찾아 하나둘씩 먼 외지로 떠나버린 자식들을 배웅했다. 이제 노인은 자신이 지은 집의 마지막 지킴이가 되었다. 그 집에서 노인은 한없이 느리고 적적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멀리서 지켜본 노년의 시간은 모든 것이 정지되어 가고 그저 사그라져 가는 듯했다. 하지만 오로지 노인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는 동안 우리는 그러한 생각의 틀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한 세기를 정주해온 노구(老軀)로부터 울려나오는 소리와 매우 구체적인 활동을 감지했다. 무엇보다 그가 살아온 한 세기 안에 공존해 있는 3대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노인의 기록될 수 없는 말은 그의 늙은 몸과 한밤중의 잠꼬대로, 3대의 연대기는 이미 분철되어 흩어진 조각들을 각 세대가 삶에 길을 내는 방식 그대로 읊어보았다.


1. 기록될 수 없는 늙은 말

노인의 몸은 대문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웃과의 왕래도 거의 없이 주로 자신의 방과 툇마루에서 생활하며, 주변 환경으로부터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노인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지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 집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장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며, 농협에 들러 세금 고지서도 처리해야 한다.

아직 노화를 겪지 않은 자들은 이러한 노인의 현실을 너무 쉽게 세계의 비참과 결부시킨다. 무진형제도 처음엔 그랬다. 도래하지 않은 늙은 자아에 대한 두려움과 연민 때문이었다. 사실 노인의 신체가 매순간 겪고 있는 한계와 고비들은 비교적 젊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오류로부터 발생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한없이 넓어 보이고,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관념으로 이뤄진 요새 같은 곳이다. 노인의 한계와 노년의 비참은 바로 그 관념의 요새로부터 관찰된 식별불가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노인과 여러 날을 함께 보내며 무진형제는 그 관념의 요새를 벗어나려 했다. 그 결과 낮에는 쉼 없이 움직이는 노인의 주름진 신체가, 한밤의 어둠 속에서는 기괴한 잠꼬대 소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주민이 백년간 거닐며 길을 낸 장소를 발견하기도 했다. 한때 가재가 잡혔지만 지금은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오염된 샛강, 독사들의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후 인적이 끊긴 대나무 숲, 호수를 메워 만든 논바닥, 죽은 아이들이 항아리에 담겨 묻혀 있는 산기슭 등. 노인이 자주 언급하는 네 곳의 풍경을 담아 영상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물론 이 모든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거나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노인의 주름진 신체는 좀체 집 밖을 벗어날 수 없다. 그의 느리고 분절된 신체 행위는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사투리 가득한 노인의 잠꼬대 속 오래된 지명과 죽은 자들의 이름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 그의 거주환경과 현재의 지형도 사이의 마찰과도 대비된다.

이처럼 노인으로부터 발견한 모든 요소가 어긋난 가운데 무진형제는 주어진 것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촬영하고 녹음해 노인의 하루 시간에 따라 재배치해 보았다. 가령 노인의 신체활동은 그 범위가 집 안에 한정되어 있으며, 밥을 먹거나 세금 고지서 봉투를 뜯을 때 매우 느리게 이뤄진다. 이러한 현실에 맞춰 그의 신체 배경이 되는 장소성을 최대한 지워내고 오직 신체의 형태와 활동에 포커스를 맞췄다. 노인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낮에 거의 대화를 하지 않은 채 활동하지만, 밤에는 잠꼬대와 소피를 보는 것 외에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노인의 하루는 한 마디로 소리 없는 낮과 움직입 없는 밤이었다. 이런 이유로 낮의 신체활동과 밤의 잠꼬대 소리를 동시에 제시해 보았다. 노인의 하루가 어떠한 형태와 사운드로 이뤄지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노인의 집 주변 풍경은 그의 신체활동이 전환될 때마다 몇 분간 등장한다. 앞서 언급했던 네 곳의 장소에 노인에게서 들은 방언과 꿈의 내용을 상징하는 칼라 필터를 사용해 색이 조금씩 변화한다. 가령 영상 말미에 등장하는 산기슭은 동네 아이들이 죽으면 항아리에 담겨 묻혔던 곳으로 비가 오면 대낮에도 매우 어두워 검은색 필터를 입혀 서서히 어둠에 뒤덮이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노인의 거주지는 구획된 지명과 주소지가 아니라, 어느 정주민의 꿈속에서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다양하게 변주되어온 꿈자리로 바뀌게 된다.

물론 무진형제가 들었던 잠꼬대를 노인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들려준 이야기마저 아주 희미한 실마리만 제공할 뿐, 중구난방으로 섞이고 흩어지다 끝내 찾기 어려운 곳으로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신체, 잠꼬대, 주변 환경을 한데 담으려 할 때마다 심하게 파열을 일으켰던 것처럼 그의 잠꼬대도 불분명한 소리와 해석 불가의 방언으로 가득했다.

잠든 노인은 침대의 한 귀퉁이를 꼭 쥔 채 잠꼬대를 하는데, 가끔 인간의 언어로 해석 불가능한 입소리를 낸다. 그 매달린 채 잠든 모습과 기이한 방언조의 잠꼬대로부터 무진형제는 박쥐를 떠올렸다. 박쥐는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 따라 울음소리가 다르다. 인간이 그들의 소리를 구 별해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노인처럼 사투리로 울고 있지 않을까. 물론 영상에서 그 꿈의 내용과 박쥐의 역할을 드러내지 않는다. 노인이 꾼 꿈의 영역은 어떻게 해도 도달할 수 없었고, 그의 목소리는 언어로 기록하거나 녹음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건 추측과 상상뿐이었고, 그가 내는 소리들은 그 집과 마을에서 만들어진 기이한 동물적 감각 같은 것으로 전달되었다. 그걸 구체화해보니 영상에서와 같은 박쥐가 만들어졌다.

영상 말미에 등장하는 박쥐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결구인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로부터 떠올렸다.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사자는 다양하게 변주되다 소설 전체를 마무리 짓는다. 어쩌면 사자는 노인이 추구한 어떤 삶의 상징일 수도 있고, 그가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독자들은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는 내내 노인의 말과 꿈 속 이미지로 등장하는 사자를 상상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게 된다. 무진형제의 박쥐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영상 제목의 ‘사자 꿈’은 헤밍웨이의 방식을 빌려왔기에 그 상징성을 그대로 두는 의미에서 제목 또한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구 그대로 차용했다.(헤밍웨이의 소설에 대한 오마주이다.)

한때 유능한 농사꾼이었던 노인은 주로 창고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말린 밤을 어디다 팔지 계산했고 어느 소를 팔아 자식들 학자금을 댈지 고민했었다. 노인이 한때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한 일가를 이루고 온 가족이 모여 북적대며 사는 꿈을 꾸던 자리 또한 그 창고였다. 비록 깊은 산 속 촌마을이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말과 신체로부터 만들어진 것들이 오래오래 지속되고 이어져 길이길이 번식하길 간절히 바랬던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 노인이 창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그곳을 방문하지 않는다. 그 부재와 망각의 자리에 무진형제는 노인이 자신의 말과 꿈 속 이미지로 오랫동안 키워왔던 커다란 박쥐 한 마리를 풀어 놓았다.


2. 분철된 연대기

안개 자욱한 숲에서 누군가 흰 석고 구(球)를 파고 있다. 그러다 빙판 위를 달리는 스케이트 장면으로 전환되고, 빙판은 어느새 3D로 제작된 지표면이 되어 있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이전의 장면을 되감기하듯 진행된다. 추상적인 모형의 구와 빙판, 그리고 가상의 지표면에 3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번째 영상의 주인공인 노인과 그의 아들, 그리고 손주의 거주(居住) 이야기다.

영상의 흐름에 따라 내레이션마다 소제목이 붙는다. 하옥(厦屋), 아문(我門), 안택(安宅)은 ‘서경(書經)’과 ‘시경(詩經)’에 기록된 옛 사람들이 살던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각 소제목은 한 세대가 구축하려던 것과 삶의 모순을 동시에 내포한다. 가령 노인의 거주지를 뜻하는 하옥(廈屋)은 본래 규모가 큰 집이라는 뜻으로, 평생 큰 집을 꿈꾸었던 장손 노인이 자기 땅에 손수 지은 집을 일컫는다. 실제 ‘큰집’으로 불린 곳에서 노인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6명의 자식 모두 함께 살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식구들이 모두 떠난 그 집에서 노인은 혼자 살고 있다. 노인의 큰아들도 고향을 떠나 자신만의 일가를 이루었다. 어린 나이에 일자리를 찾아 상경해 소위 핵가족이라 일컬어지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고, 퇴직할 때쯤 수도권에 아파트도 구입했다. 하지만 그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퇴직 후에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며 아파트 생활 유지를 위한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

내레이션의 내용은 각 세대가 꿈꾸고 실현시켰던 거주의 연대기다. 하지만 그들이 뭔가를 이루었다 싶은 순간 모든 게 무너지고 사라져버린, 그야말로 소멸의 연대기가 되어버렸다. 영상 속 인물이 파던 구처럼 길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삶의 방향성과 흔적들이 모두 지워지고, 결국엔 흰 가루만 남는데, 그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17장의 사진 이미지는 그 바닥에 떨어진 가루들의 형태를 포착한 것이다. 이 한데 뭉칠 수 없는 구의 가루처럼 3대 또한 동시대를 각자의 자리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파편적인 삶을 살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마다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긴 침묵과 공백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상에서 번호가 0인 소제목 아문(我門)은 주인공의 거주 이야기다. 하지만 주인공(그 혹은 그녀)의 삶은 뚜렷한 궤적이나 형태도 없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대기 사이에 어정쩡하게 떠돌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이 날카로운 칼로 단단하게 뭉친 구(球)를 파낸 뚜렷한 흔적이었다면, 이들의 삶은 빙판과 가상 위를 가로지르는 스케이트처럼 가볍고 빠르다. 겉보기엔 어디에도 뿌리를 두지 않고 한없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실상은 가상의 이미지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남긴 흔적처럼 어떤 연속성도 없이 계속해서 빠르게 지워지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뿌리를 내릴 곳도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와 잠시 머물던 낡은 자취방과 원룸은 지금도 구글 지도에서 삭제되는 중이다. 뒤돌아본 순간 주인공이 달려왔던 길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앞으로도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부터의 퇴거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장차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남길 유일한 유품 또한 부재밖에 없다. 이 영상의 내레이션에서 그들의 순번이 0인 이유다.

생각해보면 이 3대의 연대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식 세대로 이어지는 단절과 각자도생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영상의 내레이션은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음으로 가기까지 꽤 오랫동안 침묵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과 아버지 등. 이들 각자의 삶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보면, 모두를 하나로 묶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알 수 있다. 억지로 합쳐서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 보려 해도, 그들의 연대기 혹은 족보는 단절되고 분철되어 각기 어딘가를 떠도는, 애초에 뿌리도 열매도 없는 이야기 모음에 지나지 않는다. 거주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처음 자기 집을 지은 할아버지, 처음으로 서울에 집을 산 아버지, 하지만 그 처음을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주인공. 그 각자의 삶은 태초에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것 외에 아무런 연속성이 없다.

오늘날 주인공은 뿌리내릴 수 없는 시대의 미끈한 바닥 위에서 매번 미끄러지는 삶을 살고 있다. 제 한 몸 뉘일 곳 없이 유랑하듯 살아가기에 자기 자리를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다음에 놓을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0으로 설정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서 3대의 삶을 관찰하며, 각자가 처한 시대적 조건과 생사의 문제를 고찰한다. 무진형제는 이러한 분철된 연대기인 갈기갈기 찢어진 족보를 이리저리 흩어보며, 지금 자신들의 자리를 0점으로 돌이켜 사방으로 단절된 삶 속에서 어떤 새로운 접속과 연결이 가능한지 모색 중이다.

무엇보다 앞선 세대의 이야기를 고리타분함과 가부장으로 쉽게 규정짓고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그 각각의 분철된 연대기를 굳이 하나로 묶는 데서 폐단이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후대가 없는 주인공의 삶을 짓누르는 이유 또한 하나로 연결되고 꿰어지는 일방적 시간관념에 있었다. 때문에 주인공은 오히려 각 세대의 삶과 이야기를 떨어뜨려 놓고, 자신들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기며, 그 사이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가 되고 싶었다.

물론 앞선 세대 사이에서의 자유로움은 부정과 거부가 아니다. 오히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부장 속에서 주인공은 오히려 이들의 삶을 과거에 묻어둔 채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야 한다는 내용의 교육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이 보여주는 또 다른 동시대성, 혹은 그들 삶의 어느 부분으로부터 반짝이는 것들을 쉽게 지나치기 어려웠다.

분명 3대는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앞선 세대들과 주인공 사이에서 발견한 동일성으로 서로를 속박하거나 반대로 차이를 통해 무조건 거부하는 양단은 결국 어느 하나를 망각하거나 도그마화 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지독한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때문에 각각의 세대 사이에서 전달되지 못한 연속성과 동일성 등에 천착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그들의 삶을 관조할지, 그도 아니라면 그 단절됨 자체를 어떻게든 표현할지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그 첫 출발로써 한 가족의 연대기를 억지로 이어붙이지 않고, 전혀 다른 거주 방식에 초점을 맞춰 풀어보았다. 그렇게 각 세대의 조각난 이야기들을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3대의 연대기가 서로 간섭하고 침투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영상 속에서 독립적인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혼상제의 의무와 호적이란 정체성으로 강제로 묶이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영상의 24프레임 속에서만 한데 묶일 수 있는 3대의 분철된 연대기를 쓸 수 있었다.

정무진
무진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