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의 Expanded Plus - Borderless Storyteller의 인터뷰로 대면과 서면을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참여자: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 무진형제(이하 무)
무진형제는 정무진, 정효영, 정영돈 세 명으로 구성된 미디어 작가 그룹이다. 이들은 문학과 신화, 동시대 담론으로부터 발견한 낯선 감각을 재구성한 작품을 선보인다. 무진형제가 주목하는 주제는 신화, 역사적 기록들, 고전 텍스트에서부터 일상을 살아가는 이웃과 평범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넓고 방대하다. 이들은 그 서사의 단면을 고고학자처럼 발굴하고 추출하여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시대적 징후를 읽고 그려낸다.
특히 가장자리와 주변부를 향한 관심은 무진형제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다. 이들은 그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다층적으로 엮어내며 소통의 언어를 확장해 왔다. 생존을 위해 노동을 멈출 수 없는 노동자의 모순적 삶에 귀를 기울이는 <결구>(2015),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존재가 주는 매혹과 두려움을 형상화하는 <오드라덱>(2013)은 기존의 사회 질서 혹은 고정 관념 속에 방치된 타인의 역사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당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무진형제의 작업은 영상 설치부터 상영,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매체와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추상적인 이미지 너머로 도약하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비화>(2016)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세대 간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풍경>(2016)은 한가지 형식에 매몰되지 않는 그러한 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대담하고 독특한 영상 언어로 두각을 나타낸 무진형제는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코리아 비디오아트 프로덕션 어워드 2019년에 수상을 한 바 있다.
작품이 관객과 소통하는 ‘공동의 장’이길 바라는 무진형제의 바람대로 이들의 작업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입장에 서기보다는 관객들이 스스로 해석하며 다양한 경로에서 만나는 방식을 추구해 왔다. 특히 100명이 넘는 노인을 인터뷰하며 태몽을 수집하는 <태각> 프로젝트는 무진형제의 작업 세계가 공동의 이야기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전공을 바탕으로 협업하는 무진형제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무대를 만들고 촬영한다. 작업 과정에서부터 공동성을 품고 있는 이들의 행보는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나아가는 길을 묻는다. 개인의 사적인 연대기가 어떻게 보편적인 이야기로 환원될 수 있는지 사유하는 무진형제는 시대의 방향성을 반문하고 증언하며 묵묵히 작품세계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익숙한 풍경의 틈을 비추는 낯선 시선
전: 영상 매체를 중심으로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현실의 순간을 새로운 이야기나 연극적인 환경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작업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무: 지금까지 저희의 작업은 사전에 구상하고 조사한 것들을 바탕으로 영상 안에서 미술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해 왔습니다. 카메라에 담긴 것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보다, 미술적 장치를 통해 얘기하는 작업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부정은 아닙니다. 가령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동네의 이야기를 찍는다고 할 때 우리가 카메라로 그 장소를 정말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을까요. 가령 그 장소에는 부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고, 잊힌 과거의 풍경이 중첩돼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장소로부터 들은 이야기, 인상 깊은 장면들, 그곳으로부터 생성된 감정의 조각들로 새로운 설치 작업과 신화 속 인물들을 상상하며 이를 영상에서 미술적 장치를 통해 구현하려 합니다.
전: 눈에 보이는 것들 이면에 쌓인 시간과 감춰진 이야기를 함께 포착하는 것은 무진형제만의 독특한 시선 같아요. 그 연장선상에서 <풍경(風經)>은 다른 영상 작업에 비해 이야기와 이미지가 구체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업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어요?
무: 저희 아버지 세대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끝내 자식들과 소통되지 못한 채 말들이 바람처럼 흩어져 버리는 윗세대들에 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작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르메콜레온’은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에서 차용된 이야기로 가지고 왔어요. 머리는 사자인데 몸은 개미 같고, 그래서 초식도 육식도 할 수 없으며, 야생성과 순응성의 어느 한 방향으로도 갈 수 없어, 어떻게든 균형을 맞춰갈 수밖에 없는 세대죠. 이전 세대의 것들을 지켜가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걸 거부하는 마음도 있어서 도무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청춘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세대 문제와 윗세대로부터 괴리되는 지금의 청춘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세대 간의 괴리와 다름, 그로 인해 소통할 수 없는 세태에 대해 질문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한 번쯤 이런 주제로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그때 마침 ‘세월호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어른들로부터 제일 듣기 싫어했던 말이 ‘가만히 있어라’입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젊은 우리는 윗세대가 명령하듯이 던지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들어야 할지, 그들이 만든 사회 시스템을 비롯한 모든 과거의 것들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전: 이야기를 구상할 때 이 캐릭터를 떠올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무: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에서 ‘미르메콜레온’이 등장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작업할 당시엔 상상 속 동물임에도 꼭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낸 것 같았거든요. ‘미르메콜레온’은 사자의 머리로 고기를 먹으려 하면 그의 개미 몸이 소화를 못 시키고, 개미의 몸뚱어리로 풀을 뜯어 먹으려 하지만 사자의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낼 수도 없고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살 수도 없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어떻게든 그는 결핍된 신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 신체의 강렬하면서도 모순된 욕구, 즉 끝내 채워지지 않을 식욕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그때보다 더 나이를 먹은 지금, 무진형제에게 ‘미르메콜레온’이란 존재는 모든 세대로 확장돼서 받아들여집니다.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결핍과 배고픔이야말로 저희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니까요.
전: 작품에 등장하는 눈이 달린 시계나 머리가 두 개인 뱀의 형상이 의미심장한데요, 어떤 지점을 보여주고자 했나요?
무: 그러한 장치들은 영상 속 주인공들의 객관적 시간과 역사의 인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영상 속 시계에는 많은 눈이 달려 있지만, 주인공들 중 어느 누구도 이를 정확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며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아주 가끔 시계를 보며 바늘과 눈을 맞추고서야 소위 객관적인 시간이란 것이 얼마만큼 흘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각자가 처한 현실과 상황에 따라 세계의 흐름과 역사적 사건들을 띄엄띄엄 파악할 수밖에 없잖아요. 영상의 주된 배경인 주인공의 집 또한 그의 노동과 생활에 의해 쓰이고 구획 지어지며 동시에 객관적인 시간이나 역사적 사건 등이 왜곡되고 분절되 무수한 틈을 만들어내는 곳이 되어버립니다. 그 집 안을 떠도는 기이한 생명체들과 알 수 없는 현상들은 바로 그 틈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주인공이 평범한 생활을 할 땐 객관적인 시간이 알아서 작동하고 있겠죠. 하지만 어느 순간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이나 자연스럽게 작동되던 시스템이 무너질 때, 주인공을 둘러싼 삶의 다른 측면이 열리기도 합니다. 현관의 ‘우로보로스’가 결계를 치고, 눈에 잘 보이지 않은 채 집 안을 배회하던 온갖 신화적 동물들이 집 안 한가운데서 춤을 추기 시작하고, 갑자기 미르메콜레온이 등장해 주인공 형제들을 뒷걸음치게 만드는 거죠. 무진형제도 어릴 때 아주 가끔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소환에 관한 것인데요. 집안에 큰 우환이 닥쳤을 때 집안 어르신들이 갑자기 터줏대감을 위해 상을 차리고 부엌으로 가 조왕신께 빌고, 무진형제 중 한 명이 배 속에서 거꾸로 태어날 뻔했을 때 삼신할머니께 비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존재들이 갑자기 소환됐을 때 우리 집이란 공간은 보이지 않는 시간과 무수한 경험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아무래도 무진형제의 작업에는 이런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 <풍경(風經)>에 등장하는 ‘바람의 말’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세대의 언어로서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서나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소통의 가능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무: 주인공의 집 밖에서는 무수히 많은 타인들의 말들이 바람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나이, 성별, 거주지 등의 이유로 인해 생성된 타인의 말들입니다. 그 바람의 말들 속에는 주인공 형제들의 아버지가 전한 말도 포함돼 있죠. 하지만 형제들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그 말들을 차단해 버립니다. 물론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집 안을 돌아다니듯, 그들의 주변을 맴돌던 타인의 말, 혹은 다른 세대의 언어들은 그들 집 안을 배회하던 신화적인 존재들처럼 점점 더 뚜렷하게 부각됩니다. 때론 바람의 말을 차단한 채 살아가는 형제들을 이용해 더욱 문을 꽁꽁 걸어 잠그게 만드는 또 다른 외부의 말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전단지로 전해 받은 공식적이고 단호한 명령어죠. 그 말들은 뚜렷하게 기록돼 있고 매우 분명하게 읽힙니다. 바람처럼 흐르기엔 너무도 무겁게 형제들의 삶에 가라앉은 부유물 같은 말들입니다. <풍경(風經)>을 만들 당시, 무진형제는 우리 세대가 들을 수 없고 듣지 않으려는 윗세대들의 언어를 기이한 옛이야기 또는 신화와 연결해 이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저희는 <여름으로 가는 문>과 <태각(胎刻)>, 그리고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란 작업을 통해 만났던 다양한 세대가 전하려 하지만 잘 들리지 않던 말들, 개인의 내밀한 말과 웅얼거림까지 <풍경(風經)>에서 언급된 바람의 말에 포함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의 노인과 함께 지내며 우리는 그의 느린 몸짓과 옛 이름들이 난무하는 잠꼬대를 통해 그가 전하는 정주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여름으로 가는 문>을 촬영하는 내내 우리는 말이 잘 통하지 않던 소년이 줄넘기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며 도리어 그가 보내고 있는 뜨거운 한순간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진형제는 <풍경(風經)>에서의 바람의 말을 동시대의 다양한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확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전: <풍경(風經)>은 애니메이션으로 작업을 하셨어요. 만드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 매체를 특별히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무: 스톱모션 영상은 보통 세트를 작게 미니어처로 제작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세트를 3mx3mx3m 크기로 매우 크게 제작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체가 느끼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영상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간과 시간의 간극이 커서 그것을 맞추기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작업을 하는 동안 초 단위로 생각하며 움직여야 하는데, 저희는 워낙 큰 세트와 인형으로 작업해 마치 우리가 연기를 하듯이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희는 평소 자연스럽게 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초당 24프레임의 스톱모션 촬영 방식에 맞춰 분절해야 했고요. 그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행동을 할 때조차 엄청나게 많은 프레임이 담긴다는 것을 신체적으로 체감했습니다. 공간과 시간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죠. 아무래도 세트가 설치된 곳이 저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이다 보니 평소와 다른 시간 계산과 몸짓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죠. 이제는 스톱모션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기 때문에 다시는 <풍경(風經)>때와 같은 실수와 수고를 반복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때 커다란 인형과 대형 오브제들과 한 몸이 되어 움직였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새로운 경험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전: 이번엔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작업 이야기로 넘어가 보고 싶습니다. 두 영상은 서로 독립된 작품이지만 긴밀한 연결성을 갖고 있어요.
무: 1부와 2부 모두 50분 정도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그중 1부는 한 노인의 낮 시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한곳에서만 정주한 노인의 신체와 공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2부에서는 1부의 노인과 노인의 아들, 그리고 주인공의 거주와 관련된 서사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각각의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영상에서도 각기 다른 장면과 내레이션의 공백에 의해 ‘분철된 족보’처럼 펼쳐지죠. 동시대를 살고 있는 3대가 전혀 다른 거주 방식에 따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공간과 삶의 방식, 그리고 전혀 다른 거주 방식에도 불구하고 3대가 어떻게 소통하고 공존하는지 질문을 던진 작업이기도 합니다.
전: 특히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석고 깎는 장면은 퍼포먼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노인의 시간이 깎여 사라져버리는 것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어떻게 연출하게 되었나요?
무: 할아버지는 아주 큰 집에서 다복한 가족이 많은 집을 꿈꾸셨지만 혼자 계시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도시에서 나만의 안락한 가정을 꿈꾸시면서 집을 마련했지만 결국 일터로 나가야만 했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어요. 정교하게 무엇인가를 깎는데 그럴수록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삶의 흔적, 삶의 시간이 계속해서 닳아지고 무너지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가치 판단 이전에 삶 자체를 관조해 보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을 이야기하면, 결국 그의 시간과 신체가 깎이고 길을 내다 결국엔 사라지는데, 그 삶의 흔적과도 같은 가루가 자연스럽게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무척 아름다워요. 영상의 중간중간 등장하는 우주의 어느 한 곳을 담아낸 것 같은 장면들은 석고를 깎고 남은 것들이 떨어지며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새김의 행위 뒤에 오는 가루들이 만들어내는 모습들이 은하의 우주 같기도 하고 별자리의 장면 같기도 합니다. 각자 삶에 길을 내기 위해 깎는 과정은 정해진 시간성 안에서 진행되지만, 그것을 멀리서 보면 우주와 같은 이미지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관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 ‘시간이 깎인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삶을 완성해 나가기보다는 사라지는 삶의 형태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무: 구가 생성되는 과정으로 삶의 형태를 얘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이미 만들어져 주어진 구에(삶은 이미 태어난 순간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길을 내며 사라지는가의 문제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길을 낸다는 말이 있듯이 깎이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길들이 우리의 삶을 더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를 실제로 조각하며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깎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틀어지기도 하고 엇나가기도 하고 그러다 생각지도 못하게 잘 깎여서 예쁜 길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깎이는 길들이 계속해서 생겨남과 동시에 구는 점점 작아지죠. 그 모습이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다 깎이고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조각 가루들이 또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우주의 이미지 같았습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우주의 이미지는 바로 그러한 깎임과 소멸의 과정으로부터 생성된 결과물입니다. 물론 그 우주 이미지는 다 깎인 구의 가루를 목격하고 주워 모아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노인과 그의 아들의 거주 이야기가 누군가의 기억과 앎을 토대로 재구성된 것처럼요. 이 영상의 중간에는 빙판 위를 달리는 스케이트 장면도 함께 등장합니다. 그 매끈함은 깎기 전의 구와 비슷하지만 깎인 순간에 생긴 얼음 파편은 금세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 영상에서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이리저리 떠돌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거주 방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젊은 세대의 거주지는 가상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검색되지만 그는 자신의 거주 이야기와 삶의 방식을 전할 누군가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달리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은 채 소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낸 길로부터 남은 파편을 줍고 그걸 한데 모아 한 생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줄 후세가 없기 때문이죠.
전: 1부의 할아버지의 집을 보여주는 작업에서는 누적된 시간성이 함께 느껴집니다. 오늘날의 거주 형태와는 다르다고 느껴지는데요, 어떤 점을 주목하고자 했나요?
무: 할아버지가 집을 지으시고 한곳에 정주하며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비단 그의 삶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거주지에도 그 주인의 삶과 비슷한 시간성이 누적되어 있었죠. 저희의 삶과는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100년의 삶을 정주한 할아버지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의 오랜 정주의 역사는 주변의 환경과도 함께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의 100년에 가까운 정주는 거대한 호수였던 곳이 논과 밭이 되고 산이 있던 곳이 빈터가 되어 다시 집이 세워지는 엄청난 시간성을 통과해 왔습니다. 영상에서 노인이 잠꼬대하는 소리가 들려요. 나중에 듣게 된 꿈 이야기는 옛날 본인들이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였는데 지금 노인이 살고 있는 환경과는 또 다른 꿈의 서사 방식이 재미있었어요. 저희는 몰랐던 역사이기도 하고, 모르는 이미지인데 꿈을 통해 잠꼬대로 드러난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낯설었습니다.
전: 할아버지가 이야기해 주셨던 꿈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까요? 이렇게 포착한 장면이 작업에는 어떻게 반영되었나요?
무: 영상에서 보면 “하나 마나 하더라”, “잊어버리고 안 와부러” 이 두 대사를 제외한 모든 할아버지 말소리는 새벽에 녹음한 잠꼬대 소리인데요, 할아버지가 낮에 활동하시는 시간에 잠꼬대를 입혔어요. 영상의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는 할아버지가 잠꼬대를 하시는 소리인데 낮 장면에도 이 소리를 입혔어요. 낮과 밤이 중첩된 것처럼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깨어 있는지 모르는 상황을 담고 싶었어요. 장면 역시 클로즈업으로 촬영해서 주름이나 이런 것들을 낯설게 보여주고 싶었고 노인과의 거리감을 좁혀보고 싶기도 했고요. 개인의 기억이 꿈의 내용과 잠꼬대로 드러난다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고 역사라는 것이 객관적인 이름과 지명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몸속에 간직한 환경과 기억, 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할아버지의 꿈 이야기는 특정한 사건이라기보다 그가 약 한 세기를 살아온 마을의 옛 풍경과 이름, 그리고 그곳에 살았지만 지금은 없는 사람들과의 매우 평범한 일상과도 같았습니다. 아주 오래전 먼 옛날 그의 기억에만 남은 사람들과 사라진 장소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거든요. 지금은 없어진 언덕 위 큰 나무 아래서 어딘가로 자꾸 걸어가는 그의 아버지를 애타게 부른다든지, 그 사이에 지금은 안 계신 동생분들이 등장해 그 이름들을 호통치듯 부르기도 합니다. 새벽에 그가 부르는 무수한 옛 사람들의 이름과 알 수 없는 말들에 의해 저희도 자주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죠. 위의 질문에서 우리는 할아버지의 잠꼬대를 언급했는데, 그 잠꼬대로부터 구체적인 이름들을 지웠습니다. 내밀한 가족사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사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자주 얘기해 주었지만, 그렇게 전달되는 얘기보다 그의 잠꼬대를 통해 전달되는 얘기가 주는 아우라가 더 컸습니다. 그가 낮에 잘 내비치지 않던 수많은 감정들이 잠꼬대를 통해 드러났거든요. 그래서 이상하게도 그의 꿈 얘기는 그가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 잠꼬대를 통해 듣는 게 더 실감 났습니다. 가령 살아생전 친하게 지내다 급사한 지인이 꿈에 나타날 때 그의 잠꼬대는 매우 안타깝고 슬픈 어조로 바뀌는데요. 다음 날 그로부터 지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감정들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간 것들에 대한 쓸쓸함뿐이죠. 사라지고 파괴되고 부재한 것들에 대한 그의 기억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세계와 역사 속 장면일 수도 있지만 그의 잠꼬대는 거기에 담긴 무수한 감정선들을 드러냅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정확한 말로 옮기고 번역할 수 있을까요. 오직 그의 꿈에서만 나름의 이미지와 말로 작동되고 있는 장면인데요. 그 번역 불가의 언어, 재현 불가능한 이미지가 내는 잠꼬대 소리에 무진형제가 강렬하게 이끌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 쓸쓸해 보이는 노인의 현재, 가령 가족사진과 옛 물건들에 둘러싸여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는 모습과 마치 모든 기능을 잃은 듯한 거주지의 빈 공간에 그의 잠꼬대를 중첩시켜 예전의 그의 삶, 그가 현재 꾸고 있는 꿈속의 내용을 각자 유추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전: 할아버지를 오랫동안 카메라에 담으면서 무진형제의 생각이나 느낀 점에 있어서도 달라진 부분이 있었을 것 같아요.
무: 멀리서 바라볼 때에는 노인이 주무시고 계신지 깨어 있으신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데요, 촬영을 시작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망원이나 광각에서 느낄 수 없었던 미세한 움직임들이 포착되었어요. 그런데 90m 메크로렌즈 로 카메라를 당기면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워요. 그러한 흔들림이 역동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 할아버지를 촬영하는 것 자체도 굉장히 예민하고 날카롭게 그 운동성을 따라가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눈으로 보는 빠름과 느림이 다가 아니라는 걸 느꼈죠. 가까이서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힘을 내서 한순간 빠르게 움직이고 그러다 멈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노인들만의 신체가 보여줄 수 있는 속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이 작업을 만든 뒤에 동네에 파킨슨병을 앓고 계신 분이 굉장히 느리게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 움직임이 다르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분이 엄청난 힘을 내서 본인만의 속도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어요. 결국 우리 모두 다른 몸의 속도로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전: 노인이 지닌 역동성처럼 멀리서 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지점이 있네요.
무: 영상을 촬영하고 난 뒤에 또 하나의 변화가 있어요. 최근 병원에서 상주 보호자로 어머니를 간호하게 되었는데 같은 병실에 팔순 구순의 뇌졸중 환자들이 계십니다. 낮에는 그분들의 존재감이 없는데 밤만 되면 고통스러워서 소리를 지르신다거나 가래나 혈액을 빼는 기계 소리가 들리기도 해요. 기계 소리가 커지면 갑자기 어떤 할머니가 웅얼거리듯이 아프다는 말을 내뱉어요. 그러면 맞은편에서 침묵하고 있던 할머니가 화답하듯이 이상한 소리를 내요. 그렇게 세 분이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듯 온몸으로 아픔과 고통의 소리를 내지릅니다. 예전 같으면 잠을 못 자고 불평불만을 쏟아냈을 텐데 이 작업을 거치고 나니 노년의 신체와 그들이 내는 소리들이 이전과 다르게 들렸습니다. 그들이 내는 소리로부터 어떤 리듬을 발견하기도 하고 주고받는 대화 같기도 했거든요. 그걸 듣다 잠이 들기도 했고요. 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인간의 병든 몸 위에 나이든 몸이 겹쳐져 내는 소리가 동시에 들릴 때가 있습니다. 마치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의 노인이 잠꼬대 도중에 내뱉던 신음 소리도 그와 비슷했죠.
전: 한편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는 소년의 일상에 주목하고 있어요. 이 작업은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되셨나요?
무: <여름으로 가는 문>은 “나는 키가 작아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을 하면서도 하루에 4,000개씩 줄넘기를 하는 사춘기 소년에 관한 작업이에요. 소년은 아침마다 4,000개씩 줄넘기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용한 움직임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이 소년이 줄넘기를 한 것은 살을 빼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어요. 여드름이 많이 나는 사춘기 시기에 에너지를 어떻게든 분출해야겠다는 추측이 들기도 하지만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고 정작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스스로가 무력하다는 부정적인 말이 전부였습니다. 사실 줄넘기라는 행위를 통해 더 큰 말을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모순됨이 재미있고 흥미로웠어요.
전: 이 작업은 특정 공간에서 텍스트, 설치와 함께 선보이셨는데요 상영과 달리 전시에 주목하게 될 때 작업 방식에 달라지는 것들이 있나요?
무: 설치를 통해 다른 감각을 주는 효과가 있어요. 영상의 타임라인에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안에서 서사를 구축하기보다는 줄넘기를 하는 행위의 다층적인 요소들을 관객들이 복합적으로 체험하고 공간을 거닐면서 경험할 수 있는 환경으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여름으로 가는 문>은 1층과 2층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다란 통로 같은 애매한 공간이 있는데요. 이 공간의 구조가 삶의 애매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소년과 닮아 보였습니다. 그 공간을 폐허의 공간으로 재구성한 건 소년에게 자신을 통제하고 다그치는 어른들의 세계야말로 실상은 소통이 불가능하고 어떠한 비전도 제시해 주지 못하는 폐허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작품을 통해 발견한 세계가 실제 삶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열린 구조로 만들 때 관객들과 소통에 있어서도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이 있나요?
무: 저희는 참여형 공공미술 작업을 할 때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가장 많이 받는 편입니다. 사실 저희는 참여형 공공미술 작업을 할 때조차 관객들에게 최대한 다양한 경로를 제시하거든요. 또한 관객분들도 매우 솔직하고 다양한 피드백을 주십니다. 사실 전시장에서 작업을 전시할 때 피드백이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미술 관객분들은 원하는 시간에 미술관을 찾아 조용히 작업을 관람하고 자리를 뜨는 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작가와의 대화가 있지만 영화계의 GV처럼 작가와 함께 관람하고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도 거의 없고요. 그런 상황에서 참여형 공공미술을 할 때 비로소 현장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 함께 작업도 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중 인상 깊었던 건 저희가 2014년도에 작업했던 <M의 장(場)>입니다. 파주의 대표적인 장소 네 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관객들과 함께 진행했던 작업인데요. 네 곳에 거대한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안에 스파이 미러로 만든 기둥과 카메라를 심었습니다. 다소 어두컴컴한 공간에 들어서면 커다란 조명이 관객들을 비추는데요. 그때 스파이 미러에 비춘 모습을 보며 관객이 생각하고 상상한 바를 구조물 외벽에 그리고 쓰는 작업이었습니다. 예상외로 너무 많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제시해 주셨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한 초등학교 학생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최전방에 위치한 곳인데, 아침 조회 때 바로 옆 군부대에서 훈련하며 내는 포 소리에도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조회를 하고 체조를 하고 있더군요. 그때 한 학생이 운동장에 설치된 <M의 장(場)>으로 와서 참여한 뒤 남긴 말이 정말 인상 깊었는데요. 스파이 미러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빛의 강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밖에도 초등학생을 비롯한 어린이 관람객들이 인상 깊은 그림과 글귀를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 글귀와 그림을 하나하나 보며 저희도 참여형 공공미술 작업에 매료되었죠. 이후에도 공공미술을 하며 동시대의 다양한 직업군과 연령대의 관객들과 직접 만나 작업하며, 영상 작업을 할 때도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 <결구>는 직접 겪은 일에서 출발한 작업이기에 다큐멘터리적으로 담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연극 무대를 재가공하여 만드셨어요.
무: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로 시도할 수도 있었겠지만 2014년도 당시에는 저희의 경험을 어떻게 미술적으로 구축해 볼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저희만의 기술과 기법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막의 시대>와 <결구>는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방식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세 명이 이야기를 하면 아무리 묘사를 해도 다른 이미지와 기억들이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신기한 건 나중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조합해 보니 실제라고 믿었던 이미지와 말들이 죄다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획일적인 노동 환경과 구조물들이 각자의 신체 조건과 감각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진형제 내에서 공통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만들어가는 방식이 무엇일까를 찾게 되었고, 현실에 기반한 자료를 토대로 함께 상상하고 이미지를 만들게 된 거죠. 그때 당시에 느꼈던 저희의 경험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은유할 것인지, 토론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이야기가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예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고요. 구축된 결과를 공유하고 기다리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관객들이 저희가 심어놓은 미술적인 장치에 반응을 보이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전: 일상에서 포착되는 순간을 재가공하여 보여줄 때 그것이 타인의 경험이 아닌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된다고 느껴졌어요. 그것이 작가 개인이 아닌 ‘무진형제’라는 ‘우리’로 작업하는 방식과 관련이 되어 있을까요? ‘나의 이야기’와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점을 만들어가고 있나요?
무: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나 상상하는 바를 다른 팀원들에게 전달하다 보면 처음의 기억과 상상과는 다른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습니다. 내 속에 간직하고 있던 것들을 세상 밖으로 내뱉는 순간 더 이상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게 되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무진형제는 작업할 때 이미 내뱉은 이야기는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으로부터 출발했더라도 내뱉어지는 순간 공유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의 구상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죠. 때론 나만 기억하고 경험했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다른 팀원들에 의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살이 붙고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싹둑 잘리기도 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럴 때 자의식이 발동되기도 하는데요. 아니다 싶으면 끝까지 우기면서도 어느새 작업에 새로운 이미지나 이야기가 붙게 되면 저절로 새로운 이야기로 이동해 함께 작업의 틀을 완성해 나가곤 합니다. 공통 작업에서는 기다림도 중요합니다. 설득과 싸움의 과정에서도 누군가 납득하지 못하면 남은 사람들이 잠시 작업을 멈추고 기다려줘야 하는 거죠. 굳이 공감이 되는 부분을 끼워 넣거나 애써 바꾸려 하지 않고 그렇게 천천히 얘기하고 서로를 설득해 가면서 작업하기에 무진형제 영상의 결말 또한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열린 결말과 질문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전: 긴 대화와 기다림이 동반되었기 때문일까요. <결구> 역시 많은 것들이 절제된 작업인데요, 구체적인 대사나 서사를 최소화한 이유가 있나요?
무: 원래는 내레이션을 적었었는데 화면과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붙여보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지워나갔더니 결국 침묵이 남았어요. 뭔가를 쓰기를 했었는데 다 지워지고 침묵으로 가게 되었던 작업입니다. 일하는 것을 써서 막상 읽어보면 민망하다고 해야 하나? 그때그때마다 기억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일할 때도 말없이 일을 하듯이 노동할 때의 상황에서 전달되는 기분과 느낌을 전달하는 것에 주목하고 싶었어요. 물류센터에서 경험하면서 느꼈던 기억들을 공유하는 것이 <결구>에서 제시하는 중심적인 텍스트였는데 영상의 이미지와 겹친다는 생각도 들었죠. 이미 이미지로 주어졌는데 사람이 또 이야기를 하면 설명한다는 느낌도 들고 오히려 이미지와 실제 노동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제대로 관객들에게 제시하기 위해서 내레이션을 통해 언어로 표현하기보다 노동자가 체험했던 갑갑한 공장 소리를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 ‘묵묵히 자신의 결구를 향해 가고 있는 자‘를 통해 무진형제가 다가가고자 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무: <결구>는 죽음을 연상시킨다는 점에 있어서 비관적인 쪽으로 보신 분들도 꽤 있습니다. 저희가 던진 의문에 대한 답이 상반되는게 참 재미있었고, 그나마 긍정적인 반응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 영상은 저희 팀원 중 한 명이 작업하겠다며 물류센터에서 파트타임 노동자로 몇 년 일하다 잠시 관뒀을 때 찍었습니다. 몸도 이곳저곳 망가지고 필요한 돈을 버는 것 외에 단순 반복 노동이라는 게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작업에 들어가며 현장에서의 경험이 쉽게 잊히거나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결구>는 무진형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옥상에서 찍었는데요. 같은 아파트 지하에는 아파트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쉼터가 있었습니다. <결구>에서 주인공이 사고를 당한 뒤 배회하게 된 그 공간입니다. 말이 쉼터지 그곳에 들어가면 빛도 들어오지 않고 강렬한 시멘트 냄새를 맡고 있다 보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입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 구조와 똑같이 공간이 구획되어 있지만, 도배도 페인트도 되지 않은 채 콘크리트와 각종 배관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곳입니다. 그 쉼터에 60~70대의 청소 담당 아주머니들이 잠깐 쉬기도 하고 점심도 해결하십니다. 나이가 든 뒤에도 제 몫의 일을 하고 먹고살 비용을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하고 계셨죠. 밥벌이를 위한 노동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거죠. 간혹 <결구>의 주인공이 결국 허름한 휴게실을 나가서 어디로 갔느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에 대한 답은 <결구> 작업을 마친 뒤 물류센터를 관뒀던 팀원이 밥벌이를 위해 얼마 후 다른 물류센터에 재입사를 했다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어쩌면 전혀 다르거나 정반대의 결구를 향해 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 무진형제의 그 팀원은 어쩐지 지금 이 현실과 다른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가 따로 있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기에 일단 당면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밥벌이에 매진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노동으로부터 얻어지는 게 비록 밥을 구하기 위해 벌어들이는 돈뿐이라 해도 어쨌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밥 먹고 일이 지겨워질 때쯤 그 삶으로부터 끄집어낸 새로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업을하기 때문입니다.
전: 노동으로서 일을 하는 것과 작업을 만드는 일에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무: 노동은 아무리 긍정하려 해도 일상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꼭 기분 나쁜 단절을 불러옵니다. 오전 오후 야간으로 구분된 시간에 주로 물류센터에서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들을 포장하거나 주문서에 맞춰 상품을 모으는 일을 했는데요. 그 시간에 신체가 하는 일은 (구획된 시간에) 맞추고 (결정된 지시에) 따르고 (정해진 공간에) 적응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거나 노동을 할 때는 맞춰진 시간에 신체를 껴 맞추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참 힘듭니다. 실제로 일을 했던 물류센터의 공간은 굉장히 넓어요. 컨베이어 벨트 사이사이도 되게 넓습니다. <결구>에 등장하는 터널 역시 굉장히 넓은 공간이고요. 그런데 노동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굉장히 쭈그리고 가요. 허리를 피면 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맞추게 되는 이유가 뭘까. 노동을 할 때에는 몸이 그 환경에 맞춰지는 무엇인가 있는데 그런 부분들을 다뤄보고 싶었어요. 사실 노동과 작업은 정확한 구분이 어렵습니다. 노동하는 시간에는 제 안에서 다른 시간이 생성되기도 합니다. 당시의 경험과 인상은 작업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죠. 매우 수동적이고 폭력적이지만 그러한 자극이 때로 작업에 많은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노동을 하는 동안 느끼는 기분 나쁜 감정과 우울감을 차분히 관찰하다 보면 충만하다 못해 터지기 직전인 자의식의 어느 한 부분을 매우 강제적인 방식으로 건드리기 때문이란 걸 알 때도 있습니다. 특히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그런 자의식이 자주 발견되죠. 확실히 나름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영상 작업은 수행처럼 행해집니다. 그런데 때때로 이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진행되는 작업이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작업을 하게 되는 건 시간과 몸에 강제적으로 새겨지는 단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사유하고 상상하고 작업을 구상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제 일상과 몸의 흐름과 겹쳐지거든요. 굳이 침묵하지 않아도 되고 제 몸과 입이 내는 소리를 참지 않아도 되죠. 노동은 질문을 할 수 없고 말을 할 수 없잖아요. 작업을 할 때에는 질문을 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일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얘기를 해야 합니다. 무진형제가 수다스럽거나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 노동할 땐 아무 말 않는 게 정말 힘듭니다. 사실 작업할 때 계속해서 이야기해도 힘들지 않잖아요. 그런데 작업 때 했던 말들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어느 순간 자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다는 위험 신호를 감지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고집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 혹은 망상이 극심해지죠. 이럴 때 노동으로서의 일이 필요합니다.
전: 이 작품은 노동에 관한 묵직한 질문을 동반하지만 한편으로는 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향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무: 그런 지점들을 청소 노동자의 방에서 느꼈어요. 굉장히 허름하고 낡아서 비판적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마른 장미 꽃다발로 공간을 꾸며 놓으셨더라고요. 아주머니의 쉼터인 침대 위에 달력이 있고 바구니에 수놓은 태극기도 있었고요. 그곳은 지하인데 지상에 있는 공간과 똑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노동과 환경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일을 하다 보면 반복적이고 획일적인 일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의 신체가 실은 굉장히 다채롭고 복잡한 삶의 결들을 지나쳐왔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결구의 등장인물이 사고를 당해 다친 몸을 이끌고 지하의 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일하시는 공간이 나오게 돼요. 그때 결구의 주인공이 마른 장미와 허름한 밥솥, 그리고 바구니에 수놓은 태극기를 보고 있는데요. 다소 허름하고 차가운 노동 현장에서 유일하게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의 삶에 관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오브제들입니다. 저희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실제 청소 아주머니들의 물건이기도 하고요. 촬영하며 그 오브제들을 통해 아주머니들의 삶의 모습이나 일터에서의 감정 등이 조금이나마 전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 작업을 통해 견고한 시스템과 사회 규범에 종속된 삶에 질문을 던지고 계신데요, 작품이 사회 혹은 관객의 삶과 어떻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무: 저희는 항상 눈앞에 거슬리는 돌맹이에 대해 얘기합니다. 물론 돌맹이와 그것이 놓인 자리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유입니다. 돌멩이는 너무 거슬리고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이고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없애자고 하는 건 아니죠. 저희는 그 돌멩이로 인해 생성되는 느낌과 모순을 작품으로 만들어서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래서 관람객들과 저희가 사유하고 상상했던 결과물을 공유한다는 것만을 전제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돌멩이는 지금 당장 어떤 식으로든 제가 발 딛고 선 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린 그것에 대해 얘기할 수밖에 없고요. 하지만 그것이 없어질지 아니면 계속될지의 문제는 아직 오지 않은 문제이기에 거기서부터는 관객들이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상상하거나 혹은 실천해야만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전: 사회 시스템과 규범에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에서 <궤적> 프로젝트도 주목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궤적> 프로젝트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사회에 공존하는 보편적인 지점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졌어요.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업을 전개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지점은 무엇이 있었나요?
무: <궤적(櫃迹)> 프로젝트는 동시대의 보편, 혹은 동시대인들의 믿음 체계와 신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시작했던 작업입니다. 가령 <궤적(櫃迹)-좋은 세상>은 ‘장미 대선’ 때 개표장에서 촬영한 작업인데요. 시민의 힘에 의해 대통령이 탄핵될 만큼의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각자의 정치적인 견해차와 지지하는 정당의 이름과 색깔 외에 달라진 게 무엇이냐는 저희 나름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혁명 뒤의 정치에서 시민들 각자가 어떤 세상을 꿈꾸고 욕망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만 빠져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럴 때 고전 텍스트와 이미지로부터 우리는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했고,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의 시를 보며 한 인간이 꿈꾸는 정치적인 이상 세계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꿈을 각자에게 주어진 획일적인 투표용지 하나로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개표장을 나온 순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경계 없는 다양한 세계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혁명 이후의 첫 대선 투표를 마친 그날, 몇천만의 유권자들마다 다 다른 풍경 속에 각자의 바람과 상상하던 세계를 녹여냈을 것 같았거든요. 그걸 생각하니 우리 사회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있는 정치라는 것이 참 작고 비좁게 느껴졌습니다. 고전 작품은 동시대의 비좁은 틀 안에 갇힌 우리의 생각과 감각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우리가 어떻게 인용할 수 없겠지만, 과거의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죠.
전: 무진형제의 작품이 현실에 기반하지만 시공간의 확장성이 느껴지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까요?
무: 저희의 작업은 다소 비현실적인 공간을 담아낼 때조차 실은 바로 여기, 우리가 숨 쉬고 생활하며 작업하는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의 영상이 우주의 이미지로 변화할 때조차 그건 이 지상의 것,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에서 누군가 깎고 파낸 이 땅 위의 재료로부터 만들어지죠. 저희의 시공간에 대한 생각은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1>에 가장 잘 담겨 있는데요. 그 영상을 작업하는 내내 저희에게 노인의 삶이 매우 신화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을 한곳에서 지내며 스스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마을은 호수였던 곳이 논과 밭이 되었고, 일꾼들로 가득했던 대나무밭은 무덤과 뱀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빠르고 거칠게 흘러가던 노인의 삶이 매우 느린 속도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무진형제 작업에서 아무런 장치나 설치 작업이 없이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작업은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1>이었는데요. 오히려 그 현실적인 공간에서 인간과 땅에 대한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노인의 잠꼬대 소리를 배경으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노인만 늙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지은 집 또한 함께 허물어져 가고 있었죠. 가족들은 사진으로만 남아 노인의 침실을 둘러싸고 있고, 여러 개의 밥상은 허름한 벽에 걸린 채 먼지만 쌓여 있죠.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 떠도는 이야기와 노인의 잠꼬대 소리, 그리고 수많은 부재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풍경(風經)>에서도 그렇지만 저희는 이 실재하는 땅 위의 공간 어디서든 신화와 상상, 그리고 온갖 미스터리한 것들이 함께 존재하고 작동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 소년이 줄넘기하는 공간 또한 마찬가지죠. 그가 매일같이 4,000개씩 줄넘기를 하는 공간, 청소년기 소년의 열기로 가득한 그 공간으로부터 느낀 감각은 뜨거운 여름 날씨를 닮아 있었고, 느닷없이 출연한 늙은 사마귀는 모든 생명체가 겪어야만 하는 생장수장(生長收藏)의 과정, 즉 우주의 원리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청년기의 뜨거운 열기와 노년기의 느리고 서늘한 기운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2>에서도 저희는 단순히 3대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는 그 기이한 삶의 단면들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전: 오히려 두 발을 내딛고 있는 현실이 상상과 신화를 촉발시키는 강력한 매개체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제작에 있어서 세 명이 작업을 함께 만들면서 협력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 혹은 원칙 같은 것이 있나요?
무: 저희는 작업 속도가 느린 편이에요. 그 이유 중 하나가 한 명이라도 동의를 하지 않으면 일을 진행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너무 재미있고 신기한 소리가 만들어져도 영상에 안 맞는 것 같다 싶으면 무조건 배제하고 가기도 합니다. 세 명의 공통 감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요. 사실 저희 셋은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것들에 관심이 있고, 감각의 지점도 미묘하게 다르거든요. 그럼에도 작업 중 서로가 어떤 이미지나 사운드를 발견해 낼 때 셋이서 동시에 감탄할 때가 있어요. 그건 토론과 설득에 의해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 셋의 감각이 일치하는 순간입니다. 작업을 구상할 때는 끊임없이 얘기하고 설득하는 과정 속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지지만, 작업 도중에는 이러한 공통의 감각, 혹은 3인의 순간적인 공감이 있어야 작업이 그다음으로 이어지고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각자 끝까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그럴 땐 깔끔하게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고 과감히 포기하기도 하고 계속 설득하고 많이 싸우기도 하고요. 신기한 건 그때는 아니다 싶어서 포기했는데, 나중에 셋 다 그게 옳다고 생각해 갑자기 채택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얘기하고 또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전: 코로나 이후 우리의 삶의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무진형제가 앞으로 주목하고 있는 주제와 작업 방향이 궁금합니다. 공통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있는지 혹은 각자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 코로나 이후 자가 격리로 인해 주로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무진형제 내부에서 동시대와 세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사실 막연한 이야기였죠. 격리와 방역 외에 개인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변화된 세계를 다채롭게 경험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 현실을 대체하기 위한 가상의 경험이 다양한 방식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생겨나고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을 활용한 기술들이요. 앞으로 다가올 뉴노멀 또한 이러한 기술들과 함께 진행되겠죠. 아직 새로운 작업의 주제는 아니지만, 앞으로 새로운 삶의 재구축이 어떠한 이미지와 감각으로 다가올지 저희도 궁금합니다. 아직 이게 작업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