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dradek
오드라덱


Odradek

Why did he write such fiction? Each Moojin Brother decided to choose one most impressive fiction from Kafka’s short stories. Surprisingly, everyone chose “The Cares of a Family Man”, for the identical reason. Why did Kafka write such fiction? Odradek above all. What is this?

Odradek’s personal information is very clear. Name: Odradek, Address: Undecided, Age: Has lived long, and will live long. Longer than the family man in worries... What would he look like? The shape of a star, dirty cord, and lungless laughter. Kafka kindly describes by using every language possible. However, the more he describes, Odradek becomes far and vague. A strange phenomenon where association becomes more possible the more it is described. Then, what about the family man? There is no information given except that he is the ‘breadwinner’ of a family. But it is still sufficient enough. A clear image is depicted in the head as soon as seeing the word ‘breadwinner.’ Even about his goal and actions according to the goal.

Anyhow, Moojin Brothers’ work began from the question about Odradek. They first created Odradek themselves. As they almost completed the form, they became curious about his movements and behavior pattern, and grabbed the camera while studying his movements. So, did Moojin Brothers’ curiosity about ‘Odradek’ solved? It did, or it did not.

To Moojin Brothers, Odradek was like the fascination about the being that exceeded beyond the limit of perception. But soon, they faced the same dilemma that the family man in the fiction faced. The exploration and observation of Odradek became ‘worries.’ As they became closer to the thing that they can’t define or categorize, their anxiety grew. In fact, Odradek neither attacked Moojin Brothers nor harmed them. Despite so, Moojin Brothers were devoured by the feeling of being cornered to the cliff. Our perception and experience are a result created by fixed language and image. For example, the word ‘breadwinner’ can easily enable us to guess its image and concept. But what about ‘Odradek’?

It is completely impossible to comprehend Odradek through our existing perception, but he exists. The problem isn’t Odradek. When the unknown being can’t be objectified to the end, our anxiety reaches the maximum. Perhaps when our mind collapses completely and is animated with Odradek, we can completely embrace it. Therefore, as long as there is a sense of identity as a breadwinner – life goal and behaviors to protect the family and children – we can never shake off the worries about Odradek. Anyway, we are someone that pursues something and wear out during the relevant behaviors. Therefore, we can never understand Odradek. We are just worried and anxious. What’s worse is that as long as we are alive, we have to face the existence known as Odradek each time. Even if we perform different roles as different human beings, the worries and anxiety that we feel through Odradek will be identical. Even Odradek’s lungless laughter that we have to endure...

In fact, when they first discovered Odradek stepping back, making strange sound, Moojin Brothers followed him simply out of curiosity. But when Odradek disappeared into a totally different path away from the light and shadow created by some man, the brothers had to stop in place. What will happen to us if we take the pathless path that Odradek took, away from the set path? Can we face that man and run away easily?

Odradek will appear unexpectedly in front of Moojin Brothers someday. How will Moojin Brothers’ camera will capture that unknown existence? Will they express their concerns as breadwinners, just like in Kafka’s fiction? I wonder how our worries and anxiety will look like then.



오드라덱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무진형제는 카프카의 단편집을 읽고 각자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을 한 편씩 고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가장의 근심」을 꼽았고, 그 이유 또한 동일했다. 카프카는 도대체, 왜, 그런 소설을 쓴 걸까. 무엇보다 오드라덱. 이건 뭐지?

오드라덱의 신상정보는 매우 분명하다. 이름: 오드라덱, 거주지: 정해지지 않는 곳, 나이: 오래 살았고, 오래 살아갈 것이다. 근심 중인 가장보다 더… 그의 외모는 어떨까. 별 모양, 지저분한 노끈, 그리고 폐 없는 웃음. 카프카는 가능한 모든 언어를 동원해 친절히 묘사한다. 하지만 설명할수록 오드라덱은 더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말을 하면 할수록 연상이 불가능해지는 기현상. 반면에 가장은 어떤가.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충분하다. 가장이란 글자를 접하자마자 머릿속에 뭔가가 분명하게 그려진다. 심지어 그가 어떤 목표를 갖고 목표에 따른 행위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말이다.

어쨌든 오드라덱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무진형제의 작업은 시작되었다. 일단 오드라덱을 직접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얼추 그 형체를 완성하자마자 그의 움직임과 행동방식이 궁금해졌고, 그 움직임을 연구하다 카메라를 들게 되었다. 그래서 오드라덱을 향한 무진형제의 의문은 해결되었을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진형제에게 오드라덱은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에 대한 매혹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들도 곧 소설 속 가장과 같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오드라덱에 대한 탐구와 관찰은 근심이 되었다. 뭐라 규정할 수 없고 어떠한 범주에 넣을지 애매모호한 것과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커져갔다. 실제로 오드라덱은 무진형제를 공격하거나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진형제는 자꾸만 낭떠러지로 몰리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리의 인식과 경험은 고정된 언어와 이미지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가령 ‘가장’. 그의 존재는 이 한 단어만으로도 쉽게 그 이미지와 개념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오드라덱은 어떤가.

오드라덱은 우리의 기존 인식으로는 도저히 파악 불가능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이럴 때 문제는 오드라덱이 아니다. 미지의 존재가 끝내 미지로써 대상화 될 수밖에 없을 때, 우리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어쩌면 우리의 정신이 와르르 무너져 오드라덱과 같이 생동할 때 비로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가장의 자의식, 그러니까 가장으로서 가정과 아이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삶의 목표와 행위가 있는 한 우리는 오드라덱에 대한 근심을 결코 떨쳐낼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하고 그에 따른 행위를 하며 마모되어가는 존재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끝내 오드라덱을 알 수 없다. 그저 근심하고 불안할 뿐이다. 더 최악은 우리가 살아 숨 쉬는 한 어쨌든 우리는 오드라덱이란 존재와 매번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우리가 매번 다른 인간으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고 있다 해도 오드라덱을 통해 느끼는 불안과 근심은 동일할 것이다. 그때마다 참아내야 하는 오드라덱의 폐 없는 웃음조차.

실제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치는 오드라덱을 처음 발견했을 때 무진형제는 그저 호기심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오드라덱이 한 사내가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를 피해 전혀 다른 길로 사라지자, 형제들은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정해진 길을 벗어나 오드라덱이 들어선 길 없는 길로 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저 사내를 등지고 쉽게 달아날 수 있을까.

저 <오드라덱>은 언젠가 또 한 번 불쑥 무진형제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 무진형제의 카메라는 저 미지의 존재를 어떻게 담아낼까. 그때쯤엔 카프카의 소설 그대로 가장으로서 각자의 근심을 표현할까. 그때 우리의 근심과 불안은 어떠한 모습일지 새삼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