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

Moojin Brothers call themselves the ‘ones who discover’. To discover is to explore without an objective and to pursue without conquest. Their artistic methodology involves wandering around prior to the act of ‘looking for’ what is unfamiliar or has not been known. They must not have had a predetermined direction for their excursion when they departed. Their detour span from classical literature or fables to animations and the thermographic camera, bringing us to a variety of space and time in diverse forms. Chasing after them involves tracing back temporally and spatially, longing for a guide. Looking back, I realize how the world that Moojin Brothers represent does not incorporate any grand event, perhaps bringing about a stimulation that exceeds a certain threshold or a psychological disturbance. Instead, they bring forth a boy jumping rope, the morning market, the surroundings, and the time that ‘survived’ a simple and relaxed life with a heart that hopes for a better world. It is about a dull and prevalent fragment of everyday life that no one would particularly ruminate over as it has already been on repeat. Interrogating where the scenes took place and whose stories they tell could at times be exhausting. Moojin Brothers deliberately wander about the unfamiliar places to tell the stories from around. The hybrid process yields scenes that are familiar and unexpected at the same time, bringing about even an uncanny sensation. The ‘found’ surrounding asks a humble question of ‘why’ that has been overshadowed by the complacent days, and yet precedes the precise coordinates of where and who. How is it formed this way? 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 shows the ‘home’ where three or more space and time flow backward and through to embrace people and him. It would be a place where its intricacy is lost despite detailed articulation, bringing about emotions that fade away every minute and a sense of loss from it. One would simply step on it aimlessly to find a very strange shape.

The first video squarely examines an old man and his house that must have embraced the years as long as he has lived. The old man’s thinning hair appears in the fog around daybreak and the light of dawn before disappearing. He eats, calls someone, and goes out briefly. His days are lonesome and calm. The only deviation from his day would be tearing the edges of an envelope to wipe the stains on his fingers. The second video placed deep inside the gallery space shows someone digging his way down in the forest in the middle of the night. Then, the camera slides down and scratches the ice rink, then makes its way around the ground on which one stands, the city, and finally somewhere remote. One would think about the words that ‘lean’ on the house and those that ‘dwell’ on it. ‘Ha-Ok(夏屋, The big house),’ ‘An-Taek(安宅, The house to lie down in peace),’ and ‘Ah-Mun(我門, My house)’ all indicate a house, but with different scales. Long ago, a house had to be big enough to accommodate grandchildren. For some, home is a place one cannot completely relax to the last minute. Now, it has become an embodiment of an unsatisfied desire for ‘one’s own possession’. Let’s take a look at the word ‘geo-ju (居住)’ that puts together two letters, geo (居) and ju (住) which all mean living. Despite the meaning, the artist insists that a closer look at the word will reveal the anxiety about finitude. ‘Ju (住)’ consists of a person (人) coming into the middle of the room with a candle (主) on the hand. When the lights go off, and the figures would disappear with them.

The two videos bear the same name, only distinguished with the number 1 and 2. They carry the same statement but are different worlds in every aspect. The camera that gazed upon the character in close distance and the landscape horizontally shifts to show the crowd on the floor from a bird’s-eye view. Two is for voices. The mumbling-like noise is dispersed throughout the video. Then, there are narrators, distinctly delivering stories. Three is for the flow. It seemed like he no longer had the urge to go further. It was time for others to learn how to stop. The two videos do not hide the crack between the two and the fissure between the scenes.

In fact, it all began when the stubborn grandpa refused to leave the house, not at all making things understandable. There began the close documentation of his home and routines. The only time there was a sound loud enough to surprise me was when grandpa fell asleep. It is difficult to tell if some scenes from the first video are reality or dreams. The intrusion of those scenes will rise. Like the silent landscape that is tinged with artificial colors, sleep talk that gets on your nerves in its offbeat, and a giant bat that is crouched down on the corner. What could he be seeing in his dreams? Are they about summoned past, corrupt memories, or jumbled imagination? The physical limitations must have faded a little bit. According to Gaston Bachelard, reverie, along with thinking and experience, determines the humanist values. The house protects the musings and dreamers, allowing them to keep dreaming. It is not uncommon for a house to remind one of old memories that are cherished yet forgotten, bringing them all of a sudden from a dream. One never knows if his warehouse, once frequented but is now shut, is still full of farming tools and crops in the dream.

The old man’s sleep talk led us to spacewalk through disparate space and time, dwell on the shape and words of the house, and reflect on father and his generation. This does not mean that the exhibition defines what their or our house had been or should be. Yet it leaves behind a clear afterimage at the end of the patchwork of scenes and mixed sensations. It is none other than the impression of a circle that is completed by drawing slant lines, standing back to back. A circle is at the same time a dot and a face; it is the minimum that entails a foundation and the shape of a maximum. An infinity of small leaps reproduces again and again on top of this circle. As grandpa’s house still embodies the vibrant trembling, the dreams as the summoning of the past and connection fill the gap between generations and embrace around it. Just the way the house has always been. The title borrows from the last phrase of Hemingway’s “The Old Man and the Sea”. The line from the old man’s dream is the manifestation of his will that persistently pursues despite the futile reality. This show investigates the shaping of living that has been transforming over the past three generations and where life should be headed.

Jiyi Shin
Curator, Art Space Pool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무진형제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자’로 부른다. 발견은 목적지 없는 탐험이자 점유 없는 탐구의 과정이다. 어딘가를 유영하다가 이전에는 몰랐던 것, 생경한 것을 ‘찾는’ 행위를 작업의 방법론으로 삼고, 무엇을 보게 될지 미리 방향을 설정하지 않은 채 일단은 떠났으리라. 그렇게 그들이 경유지로 삼았던 것은 고전 텍스트나 설화부터 애니메이션, 열화상 카메라에 이르기까지 꽤나 큰 시공과 다양한 양태를 아우르고 있어 그들의 뒤를 좇다 보면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도 있고 길잡이가 아쉬울 때도 있다. 돌이켜보면 무진형제가 재현하는 세계 안에는 역치를 넘는 어떤 자극이나 심리적인 동요를 일으킬만한 심대한 사건들은 없었다. 대신 줄넘기를 하는 소년, 새벽시장, 좋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처럼 평범하고 차분하게 삶을 살아‘내어’ 온 주변과 시간들에 대해서 말해왔을 뿐이다.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되새기려 하지 않았던, 심심하고도 편재되어 있는 일상의 한 단편. 그래서 그 장면들이 특별히 어디이며 누구의 이야기인지 세세하게 따져 묻는 것이 소모적일 때도 있다. 무진형제는 주변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에둘러 낯선 곳을 헤맨다. 혼종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장면은 일상이지만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고 기이하기까지 한 감각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 ‘발견된’ 주변은 어디의 누구라는 구체적인 좌표보다 앞서 있었던, 일상이 주는 익숙함에 가려져 있던, ‘왜’라는 보다 낮은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그런 모양을 갖게 되었을까. 전시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에서도 셋, 혹은 그 이상의 시간과 공간을 역류하고 통과하여 사람과 그를 감싸고 있는 공간, ‘집’을 펼쳐 보인다. 그것이 갖는 내밀함을 언어화하면 할수록 온전히 전달되지 못함에, 시시각각 낡아버리는 감정에 조금 애틋해지는 곳. 그곳에 목적 없이 일단 발을 내딛고 헤매다 아주 이상한 모양을 발견했다.

첫 번째 영상은 고령의 노인과 그만큼이나 긴 세월을 품었을 그의 집을 퍽 정직하게 살핀다. 노인의 성긴 머리카락이 새벽녘 안개와 여명 때문에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밥을 먹고 통화를 하고 어딘가로 잠시 나서기도 한다. 우편물 봉투의 끄트머리를 뜯어내어 손톱에 묻은 얼룩을 닦는 것 정도가 예상 밖의 행위일 정도로 그의 하루는 적적하고 고요하게 흐른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 있는 두 번째 영상은 깊은 밤 산속, 무언가를 깎아 내려가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화면은 아이스 링크장의 바닥을 미끄러지며 긁어 대다가 서서히 발 딛고 있는 땅을, 도시를, 그 너머 아득한 어딘가를 커다랗게 순회한다. 그리고 집에 ‘기대하는’ 말, 집에 ‘깃든’ 말을 고민한다. 하옥(夏屋), 안택(安宅), 아문(我門)은 모두 집을 뜻하나 집에 대한 각각 다른 척도를 드러낸다. 오래전 집은 자식의 자손까지 품을 만큼 컸어야 했고, 누군가에게 집은 끝끝내 마음을 편히 놓지 못하는 곳이었으며, 지금은 ‘내 것’에 대한 열망이 허망하게 접히는 곳이 되었다. 살 거(居)와 살 주(住)가 합쳐진 거주를 보자. 이는 ‘살다’를 뜻하지만 낱말을 하나씩 펼쳐보면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 숨겨져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주(住)는 인간(人)이 방 한가운데 촛대(主)를 들고 있는 형상인데, 촛불이 꺼지면 동시에 주인공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두 개의 영상은 같은 제목을 갖고 있고 1과 2라는 숫자로만 나뉜다. 동일한 명제를 달고 있지만 어떻게 보아도 너무 다른 세계이다. 하나는 시선이 다르다. 지근거리에서 인물을, 수평에서 풍경을 바라보던 시선이 다음 영상에서는 부감으로 바닥의 무리들을 조망하다가 한없이 위로 솟구쳐 버린다. 둘은 목소리. 영상 전반에 깔리는 소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에서 다음에는 화자가 있고 또렷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셋은 흐름. 그는 더 이상 멀리 가고자 하는 충동이 없어 보였고, 다른 이들은 이제 멈추는 방법을 배워야 할 차례 같다. 두 영상은 서로와의 간극을, 장면과 장면 사이의 균열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시작은 낡은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할아버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그의 집과 일상을 가까이에서 기록하기 시작했고, 유일하게 놀랄 만큼 큰 소리가 나올 때가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잠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처음의 영상에서 꿈인지 생시인 헷갈리는 장면들이 틈입되어 있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 인위적인 색으로 물들고 있는 고요한 풍경, 엇박자를 내며 나지막이 신경을 긁는 잠꼬대,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박쥐처럼. 꿈에서 할아버지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소환된 과거일까, 변질된 기억일까, 뒤섞인 상상일까. 육체의 한계를 조금은 잊었나 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사상과 경험뿐만 아니라 몽상도 인간적인 가치를 확정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집은 그러한 몽상과 몽상하는 이를 보호하며 꿈꾸게 한다. 소중하지만 잊고 있었던 오래전 기억과 추억이 집을 매개로 하여 불현듯 꿈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것이다. 한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닫혀 있는 그의 창고가 꿈에서는 여전히 농기구와 곡식으로 가득할지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의 잠꼬대는 다른 시간과 공간 사이를 유영하게 만들었고, 집의 모양과 말을 곱씹게 하였으며, 아버지와 동세대들을 돌아보게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시가 그들의 아니 우리에게 집이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혼재된 장면들과 뒤섞인 감각 사이를 좇다 보면 마지막에 이르러 또렷하게 잔상 하나를 남기는데, 등을 맞대고 어슷하게 선을 그어가다 비로소 하나로 맞물리는 원, 원에 대한 감각이 그것이다. 원은 점이자 면이고, 기반이 갖고 있는 최소이자 최대의 모양이다. 무수히 많은 작은 도약들이 원 위에서 번식하고 번식한다. 할아버지의 집에 여전히 생생한 떨림이 존재하는 것처럼, 과거의 소환이자 연결로서의 꿈은 시간 사이의, 세대 사이의 틈을 메우고 또 둥글게 감싼다. 집이 늘 그랬던 것처럼. 제목은 헤밍웨이의 소설「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구절을 차용했다. 노인의 꿈에 등장하는 사자가 허망한 현실에도 놓지 못한 의지의 발현인 것처럼, 전시는 3대에 걸쳐 변해가고 있는 거주의 모양을 살피며, 삶이 무엇으로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묻는다.

신지이
큐레이터, 아트스페이스 풀